home
home
 
 
존 고든 멜튼 박사
존 알버트 살리바 박사
유진 반 네스 고에치우스 박사
로드니 스타크 박사
뉴톤 말로니 박사
에드윈 가우스태드 박사
home > 전문가들 > 전문가소개및 증언
에드윈 가우스태드 (Edwin S. Gaustad) 박사의 증언
 
 

편집자 주 : 가우스태드 박사는 리(Lee) 대(對) 더디(duddy)의 재판에서 증언하지 않았지만, 윗트니스리와 「지방 교회들」을 연구 조사했다. 다음은 이 책을 위한 초고에서 지난 해 연구와 추록된 결론으로서 그가 쓴 논문이다

가우스태드 박사는 미국 종교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리버사이드(U. C. Riverside) 대학의 명예 역사학 교수이다. 그는 종교사에 관하여 브라운 대학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1948년과 1951년에 각각 취득했다. 전임 미국 교회사 협회 의장인 박사는 미국 종교에 관한 학계에서 저명한 권위자이자 저자이다.

미국 법정은 가장 폭넓은 범위가 신앙의 자유에 부여된다는 것을 인정해 온 지 오래다. 최근 오레곤 주 취업국 대(對) 스미스의 사례(1990년)에서 「오랜 관례」의 특례는 많은 비평과 분노를 일으켰고, 1993년 국회의 종교의 자유 회복 운동으로 이어져, 같은 해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법적으로 승인되었다. 그 법률의 제정으로 종교적 자유는 오직 초강제적 위치의 세력만이 그 온전하고 자유로운 실행에 대한 어떤 침해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면책특권의 위치로 회복되었다. 그것은 권리장전에만 있는 자유로서, 이중의 보장, 즉 종교의 이익에 편승하지 않으며 또한 종교에 대항하여 금지하지 않는 두 가지 보장을 갖는다. 그러나 1816년에 토마스 제퍼슨이 말했던 바와 같이, 만일 우리가 종교적 자유를 제공하는 법안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여론의 심문 아래 있다면, 그 법안은 많은 실효성을 잃는다. 어떤 종교 단체, 특히 생소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단체를 공격하는 여론을 수렴할 때는 「자유 행사」가 조롱거리가 된다. 만일 공중의 격노를 유발하려고 힘을 다해 고의적이고 자극적이며, 심지어 중상모략적인 말들을 한다면, 종교적 자유에 대한 냉담한 반응은 배가될 것이다. 그러므로 (출판의)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의 무절제는 또 다른 (종교의) 자유를 심하게 제한하거나 심지어 파괴하는 것이다.

1978년의 가이아나(Guyana)에 있는 존스타운(Jonestown)의 공포와 비극 후에, 소위 「사이비교」와 정신 조종, 권위주의적인 인물들, 주류에서 종교적으로 강제로 고립되는 것 등 모든 비전통적인 종교 운동들을 자칭 자경단체라는 것들이 공격하는 움직임이 특히 무르익은 것 같았다. 뭔가 사악한 것이 나타났다. 즉 뭔가 미국적이 아닌 것 또는 비기독교적인 것이 감리교나 루터교나 로마 카톨릭이나 장로교와 같이 친숙하고 「안전한」 호칭에 속하지 않은 어떤 단체에서 진행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등이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엽은 형태가 잡히지 않거나 뚜렷이 확증된 진리의 법규에 따라 여러 면에서 「정통파」가 아닌, 비난받기 쉬운 단체들을 끝내버리기에 적절하고도 순조로운 때였던 것 같다. 그러한 영적인 심판관이나 종교 재판관들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종교적인 실험과 모든 고귀한 종교적인 영의 표현을 질식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어떤 사적인 정통주의 표준에 「미달하는」 모든 사람들을 수색하고 위협하는 자들에게 도전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비난받고 탄핵당해야 하는 「영적 사이비」일 따름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그들의 첫번째 종교 자유의 수정 법안을 부정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것은 미국 사회의 다원성을 위협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땅의 법정은 오래 전에 정통주의에 관한 결정이나 이단을 처벌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기각했다. 1876년에 미국 대법원이 말한 바와 같이(Watson v. Jones), 『법은 이단을 모른다.』 그러나 여론 법정은 항상 그렇게 자제하지는 못한다. 부당한 출판물들에 의하여 자극된 여론은 법정이 내리는 것보다 더 강력하고 치명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지방 교회”의 열정을 핍박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항상 필요로 하는 개혁의
자극을 빼앗는 것임

「지방 교회」에 대하여 조사하고, 이 교회에 대하여 「영적 사이비 연구소」와 닐 더디가 부과한 비난들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받은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방 교회」와 그것이 처한 기독교 전통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비방자들은 「지방 교회」가 한면으로는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다른 면으로는 충분한 규율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강경파」들은, 신약 성경이 내적인 「성령의 열매」를 명백하게 강조한 것을 무시할 뿐 아니라 「지방 교회」의 순수한 가르침을 무시한 채, 「지방 교회」가 그리스도인은 밖의 율법에 매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면서 불평한다. 또 「지방 교회」 교인들은 다른 모든 종교 단체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을 경멸하는 말까지 한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는, 특히 초창기에 그들 주변의 무심한 또는 전수받은 종교적 동맹과는 현저하게 다른 것처럼 보이는 열정적 확신과 독특한 힘을 나타내는 종교 단체들의 예들로 충만하다. 이 열정을 핍박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항상 필요로 하는 개혁에의 자극을 빼앗는 것이다. 「지방 교회」는 단체를 대단히 크게 강조한다고 비난받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퀘이커 교도로부터 메노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은둔적인 공동체 집단, 차별대우받고 핍박받는 모든 당파, 모든 유토피아적인 집단들의 성질을 살펴보면 된다. 이 단체들은 「지방 교회」보다 공동체 사회를 훨씬 더 강조하지만, 오늘날 폭넓은 사회적 지지를 받고 있다.

오늘날 국가에서 요청하는 가장 강력한 일치는 아마 문화적인 일치(회색 플란넬 양복과 그런 것 전부)일 것이다. 얄궂게도, 「지방 교회」는 그러한 기성 교단 사회로부터 교인들을 빼내어 간다는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교인들의 개성을 말살한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비방자들이 「정신 개조」라고 일컫는 것을 그 교인들은 회심이라 부르며, 비방자들이 유괴라고 말하는 것을 그 교인들은 복음화라고 말하고, 비방자들이 「냉철하고 지적인 시민조차」 「그들이 살고 일하는 사회에서 고립된다고」 충격을 받아 기록한 것을 그 교인들은 하나님께 신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신약은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방 교회」는 이것들의 중요성을 경시하면서 신약의 말씀을 넘어서고 있다. 물론 신약은 마약 주입이나 음주 운전이나 불법 무기 소지 등에 관하여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종교 재판관」들은 심각한 불안과 심리적 고통이 없이는 「지방 교회」를 떠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정통 유대교나, 로마 카톨릭이나, 그리스 정교나, 미주리 회(會) 루터교나, 남침례교회를 떠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불안과 고통은 따른다. 메노파 교도들은 심지어 「접촉을 피하기」만 해도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이 모든 단체들이 위협적인 사이비교거나 영적 모조품이거나 혹은 심적인 협박자들인가?

「지방 교회」를 비방하는 자들은 성경적인 기독교와 전혀 다른 이단적인 가르침들과 실행들에 대하여는 자신 있게 말한다. 이러한 비방자들은 복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천 오백여 년 동안,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기독교의 정확한 성격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나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 점에 대하여 우주적인 합의가 거의 다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성경적인 기독교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인정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영적 사이비 연구소」가 성경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얻은 기독교의 이해와 달리, 「지방 교회」의 가르침이 완전히 이단적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어떤 생각을 갖고 그렇게 한 것인가에 대하여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미국의 기독교 연구를 전공한 나로서는 그러한 공격의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지방 교회」의 신앙과 실행은 기독교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다양한 강조점과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라, 「지방 교회」는 복음주의 기독교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개신교적인 강조와 속생명에 대한 위대한 신비주의파와 경건파, 그리고 새 시대에 대한 천년왕국의 소망, 거듭남, 체험적인 종교 등의 전통 위에 서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그들은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노래하고, 추구하며, 함께 자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특별한 이상에 대하여 충성스럽게 수고한다.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신앙의 자유와도 같다.

Copyright ⓒ 2003 한국 복음서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