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이 기사에서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교회, 사도시대 끝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온 제도화된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계속하겠습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님께서 일곱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교회에 대한 예언적 역사
계시록은 예언이고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들도
예언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실제의 일곱 도시에서 일세기에 존재한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들만도
아니고, 이 땅 위의 교회의 노정에서 있는 다양한 상황들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들을 단지 구체화한
것도 아닙니다. 이 서신서들은 사도시대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의 교회 역사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것에 관하여 게벨라인(Arno C. Gaebelein)은 “일곱 교회들은 이 땅 위에 모든
교회들을 나타내고...이 일곱 교회들의 상태들은 사도들의 시대부터 끝날까지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의 다른 과정들을 예시한다.”(계시록, p.33)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사람의 의견, 역사적인 기독교계를 지지하는지 아니면 반대하는지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다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희석하지 않고 그 충격력과
능력으로 말하게 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역사적인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 것입니다.
이 일곱 교회들의 순서는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의 과정과 부합합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은 초기 단계의 끝 부분인 1세기 마지막 동안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서머나에 보내는 서신은 1세기 말부터 4세기 초까지 로마 제국으로부터 핍박받는 고난당하는 교회를
예표합니다.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은 세상적인 교회, 세상과 결혼한 교회를 나타냅니다.
4세기에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시대부터 6세기 후반 부 교황조직의 성립까지입니다.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은 6세기부터 이 시대 끝까지에 있는 변절한 교회를 나타냅니다. 사대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은 6세기에 종교개혁으로부터 나온 교회들로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교회들을 예표합니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서는 합당한 교회생활의 회복으로
19세기 초에 위치한 교회를 나타냅니다. 이 서신서는 19세기 초부터 주님의 두 번째 오심까지
다룹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은 19세기 후반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있는
하락한 회복된 교회를 나타냅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림
사도시대 끝부터 개혁의 때까지의 교회의 역사는 주로 하락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라고 말하실
때 이 하락의 뿌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주 예수님에 대한 첫 사랑 혹은 최고의 사랑을 떠나는 것이
교회의 다음 단계들의 모든 하락의 근원입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에 관하여 게벨라인(Gaebelei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p.35):
외적으로 모든 것이 옳아 보일 수 있으나 그분의
백성들의 가장 깊은 애정을 갈망하시는 주님은 그들의 마음이 그분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알고 계셨다.
이것이 모든 교회와 개인적인 실패들의 시작점이다.
역사적인 교회에서 주 예수님에 대한 많은 첫 사랑을 찾기는 매우
힘듭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교회의 다양한 조직체들 안에 주님을 깊고 달콤하게 사랑하고
그분과 친밀한 마음의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전체로 지적하자면 역사적인 교회는 그러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 위에 쏟아 붇길 원하는 사람들은 종종 광신자로 여겨져 핍박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담 귀용은 주님을 사랑함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오늘날 역사적인 교회의 다양한
가지들 안에서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일하도록 격려받지만 좀처럼 그분을 먼저 사랑하라고는 격려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님은 교회가 먼저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교회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과 결혼함
주 예수님께서 서머나에 있는 교회는 심판하시지도 않았고 칭찬하시지도
않았기에 우리의 현재의 목적 때문에 역사적인 교회의 이 방면, 고통의 시대는 우회하고 버가모에
있는 교회, 역사적인 교회의 세 가지 현저한 특징들이 묘사된 교회로 전진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지금 교회가 세상과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콘스탄틴 대제 전에는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핍박을
통해 교회를 파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핍박이 소용없는 것을 보고 사탄은 그의 책략을 바꿔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게 조장하는 대신에 세상이 교회를 환영하고 교회가 로마 제국과 결혼하도록 유혹했습니다.
버가모에 있는 교회는 상징적으로 세상과 결혼한 교회를 상징합니다. 콘스탄틴의 장려와 그의 정치적인
영향으로 수많은 불신자들이 소위 말하는 교회 안으로 침례 받았고 교회는 대단히 커졌습니다. 교회는
순결한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결혼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과의 연결은 하나님께 영적 간음으로
여겨졌습니다. 아이론사이드(H.A. Ironside)는 그의 계시록 강의(p.48)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콘스탄틴의 장려는 디오클레티안의 핍박이 할 수
없는 것을 했다. 교회를 부패시켰고, 교회는 부재중이신 주님께 순결한 처녀로서 결혼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을 잊었다. 그리고 그분을 못박은 세상과 결혼하여 결코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부정한
연합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극심한 정도까지 오늘날의 역사적 교회는 세상과 결혼한 교회입니다.
버가모에 보내는 서신에서 나타난 역사적인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발람의 가르침, 교회와 세상과의 연합의 교리입니다. 발람은 이방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음란과 우상숭배를 갖고 왔습니다(민25:1-3, 31:16). 세상적인 교회 안에서 어떤 이들은
같은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보편화되어있습니다. 이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크리스챤 디스코 나이트 클럽”이 최근에 캘리포니아에 생겨서 젊은이들이 “크리스챤
락”음악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발람은 또한 고용된 선지자의 원형, 불의의 삯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위해 말하도록 고용된 사람들의 실행을 상징합니다.
역사적인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성직자의 일은 재정 조직과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능을 하도록 고용되고 종종 그분을 향한 사랑에서 순수하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금전상의 향상을 위하여 일 하기도 합니다.
버가모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인 교회의 세번째 현저한 특징은
주님이 미워하시는 니골라당의 교리입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성직자 평신도 조직으로 교회 안에
두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 게벨라인은 이것에 대해 분명히
말했습니다(p.38):
이러한 비밀스러운 말에 대한 최고의 그리고 아마도
유일한 해석은 그 의미를 엄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 복합어이다. 니카오(nikao)는
상위 권력을 갖고 권세를 부리다라는 듯이고 라오스(laos)는 사람들(미국 영어로는 “laity")을
의미한다. 니골라당은 ”사람들 위에서 권세를 부리다“라는 의미이다. 제사장 계급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서 소위 평신도라 불리는 나머지 사람들 위에서 권세를 부렸다. 그리고 이 권세를 부리는
계급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높은 위치를 주장했다...이것이 우리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며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우리도 반드시 미워해야 한다.
니골라당의 교리를 미워하는 대신에 역사적인 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영속시키고 변호했습니다. 어떤 종교적인 단체들 안에서 이러한 계급조직은 간단합니다: 한 계급의
성직자가 평신도를 다스립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더욱 복잡합니다. 상부의 성직자 계급들이 하부계급을
다스리고 다 함께 평신도들에게 권세를 부립니다. 주님은 완전히 이 조직을 미워하십니다: 그분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인데 이는 우리 모두가 형제들이니 서로서로를 아비나 선생으로 부르지 말라는
그분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23:8-9). 더욱이,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질적인
기능을 불가능하게 하는데 이는 오직 한 특별한 계급-성직자-이 직분을 다하는 특권을 완전한 방식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절한 교회
이제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인 변절한 교회를 보겠습니다.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은 6세기 후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있는 변절한 교회를 나타냅니다.
두아디라의 적어도 다섯 방면을 주님이 책망하셨습니다: 끊임없는 제사, 이세벨의 가르침, 음란,
우상숭배, 사탄의 깊은 것.
헬라어로 두아디라의 의미는 “향기로운 제물”이나 “끝없는 제사”입니다.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는 제사가 가득한 변절한 교회를 나타냅니다. 이 끝없는 제사에 대하여 아이론사이드(Ironsid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p.50):
...두아디라는 끝없는 제사를 의미하는 것 같다...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위한 끝없는 제사는...중심과 뿌리와 신성모독-주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죄
있는 세상의 죄들에 대한 유일하게 만유를 충족시키는 제물-에서 끝내신 일을 부인.
주님이 책망하신 두아디라의 두 번째 방면은 여자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계2:20).
이세벨은 마태복음 13장 33절에서 주님이 예언하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더한 사람입니다. 아합의
이방 아내인 이세벨은 변절한 교회의 모형이었고 이세벨의 가르침은 변절한 교회의 가르침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변절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말했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중요합니다. 게벨라인(Gaebeleim)이
말하길 변절한 교회는 “여자를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 놓았고” 교회는 “교사와 절대 권력자의
위치를 맡았고 그리스도는 거절되었다”(p.38)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게벨라인이 지적하길 “이세벨은
이중 의미가 있다. ‘순결한 자’라는 뜻도 있지만 ‘타락한 상태의 사람’이란 뜻도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이 대표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모든 더러운
것과 부패의 타락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맺길:“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예언된 심판이
임할 때까지도 뉘우치지 않은 상태로 계속 갈 것이다”(p.39)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책망하신 두아디라의 세번째 특징은 음란입니다. 변절한
교회는 영적이고 물질적인 두 방면에서 모든 음란의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계시록 17장에서는
큰 음녀라고 부릅니다. 버가모 교회에서 처음 묵인된 영적 간음은 교회와 세상과의 연합입니다.
주님이 갈망하시는 교회는 그분을 향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순결한 처녀입니다. 하지만 변절한 교회는
주님께 신실하지 않고 음란에 빠졌습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두아디라의 네 번째 특징은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두 번째 계명(출20:4-5)에서 철저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절한
교회는 우상숭배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이 책망하시는 다섯 번째의 것은 분명히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사탄의 깊은 것”입니다. “깊은 것”이란 단어는 상징적으로 비밀스러운 것들을 나타냅니다. 변절한
교회는 많은 비밀들과 깊은 교리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탄적인 비밀들의 철학은 사탄에 의해
교회를 손상시키고 부패시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불완전함과 죽어있음
사데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은 개혁 동안과 그 이후 성립되어
주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 계속할 여러 종교적인 단체들을 예표합니다. 사대가 예표하는 이러한 조직들은
두 가지 현저한 특징들로 눈에 뜨입니다: 불완전함과 죽어있음. 개혁은 변절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비록 개혁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되는 것을 회복하고 대중들의 언어로 성경을
출판하는 등의 의미 있는 일들을 성취했지만 충분하지는 않고 불완전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
예수님은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나니”(계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혁이 교회를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로 이끌지 못했기에 주님은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가 필요하셨습니다.
더욱이, 여러 가지 종교 조직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길,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이라 하셨습니다. 사대에
대하여 게벨라인(p.40)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혁 자체는 하나님에게 나온 것이며 쓰임받은
위대한 사람들은 성령의 가장 중대한 도구들이었다. 사도들의 때부터 그 시대까지는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사람의 조직이 나왔다...개혁은 잘 시작했지만 곧 죽은 생명
없는 것들로 발전했다...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지만 죽었다.
죽음보다도 더 하나님 눈에 가증한 것은 없습니다. 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심각성을 알고 있지만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죽음의 심각성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죽어 있는 것을 허용하실 수 없습니다. 비록 역사적인 교회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지만 조직으로서 그것은 죽어있음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주님이 오늘날 갈망하시는 것
주님이 책망하신 역사적인 교회의 방면들을 요약하고, 주님이 교회가
오늘날 어떻게 되기를 갈망하시는지에 대한 말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에베소에서 우리는 주님이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꾸짖는 것을 보았습니다. 버가모에서 세상과 연합된 것과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교리를 심판하셨습니다. 두아디라에서 끝없는 제사와 이세벨의 가르침과 음란과 간음과
사탄의 깊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대에서는 불완전함과 죽어있는 것을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모든 특징들이 기독교계의 각 가지마다 발견되지는 않더라도 역사적 교회를 전체로 볼 때 이
모든 요소들이 그 안에서 보입니다. 오늘날의 종교적인 조직 어디에서 주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을
갖고 있으며, 절대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분별되어 있고, 성직자-평신자 제도를 폐지하고 단순히 형제들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모이며, 변절한 교회를 통해 들어온 사악한 혼합인 모든 누룩들로부터
자신들을 정결케 하고, 우상숭배나 음란의 어떤 모양도 허용하지 않고, 불완전함과 죽어있음을 미워하는
개인들이 아닌 단체적인 무리의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역사적 교회 안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 순수하고 절대적이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며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그분이 책망하시는 것들로부터 자기 자신들을 분별한 개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교회 전체로는 그러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서신서들에서 주님이 책망하시는 바로 그것들로
침투되어있고 적셔져 있습니다. 역사적인 교회가 그렇게 하락했기 때문에 주님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영문 밖으로 나아갔습니다”(히13:13). 그것은 그들이 오늘날의 종교적인 제도 밖에서 주
예수님과 몸의 교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추구하는 무리는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주님께 칭찬 받은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로 예표되었습니다. 이것은 빌라델비아에 있는 교회가 주님의 갈망을 만족시키고
교회에 관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빌라델비아의 세 가지 뛰어난 특징들을
단순히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형제 사랑, 주님의 말씀을 지킴, 주님의 이름에 충실함.
빌라델비아에는 성직의 계급조직, 성직자-평신도 제도가 없습니다. 모두가 단지 형제입니다. 빌라델비아에는
이단적인 가르침들이나 이교도의 실행이 없고 주님의 순수한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실했는데, 이는
역사적인 교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에는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없고, 세상적인
것은 어느 형태라도 책망받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폭로됩니다. 빌라델비아에는 분열적인 이름들이
없고 한 이름만 있는데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분 자신을 교회에게 주사 그분의 피로 교회를 사셨을 때 그분의 의도는 빌라델비아와 같은 교회를
얻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다양하게 나타난 역사적인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그분의
말씀에서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 신실하다면 우리는 우리 세대에 그분의 말씀에
반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된 부담은 단지 역사적인 교회의 부족함을 폭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협력하여 그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함으로써 그분이 갈망하시는 교회의 실질적인 표현을 갖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 신실함으로 우리는 반드시 역사적인 교회 밖에서 서있어야 하며 역사적인
교회로부터 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분에 대한 사랑에서 우리는 반드시 빌라델비아를 위하여 서고
빌라델비아와 함께 서야 합니다. 주님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교회에 관한 그분의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그분을 좇기 위해 곧은 길과 청명한 하늘을 허락하시길. 이 세대에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
성취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