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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왜곡시키는가 생각을 새롭게 하는가

 
 


생각을 왜곡시키는가 생각을 새롭게 하는가?

내 용

거짓 비방
생각의 정상적인 기능
타락한 천연적인 생각의 상태
회개의 필요
생각을 새롭게 할 필요
생각을 새롭게 하는 과정
새롭게 된 생각의 특징들
영과 생각
개인적 간증
각 주

생각을 왜곡시키는가 생각을 새롭게 하는가?

토마스 넬슨(Thomas Nelson)출판사는 최근에 마인드벤더스(The Mindbenders)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오늘날 가장 위험한 신흥 이단 중 일곱 개에 대한 주요 정보와 그들에 대한 논박”을 제공할 취지로 출판되었는데[ 1 ] 그 안에는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라는 제목의 장(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논지에 따르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구속받고 영으로 거듭난 믿는이들로 구성된 지방교회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 2 ] 이 책은 지방교회를 해리 크리쉬나(Hare Krishna)나 문 선명의 통일교회와 같은 마귀 사탄적인 집단과 동일한 무리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일련의 거짓 비방들이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며 지방 교회에 대해 다루는 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방교회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고 이러한 생각의 통제의 목적이 행동 수정이나 세뇌라는 비방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입니다. [ 3 ] 이 책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과 지방교회들의 간증과 실행에 대해 너무나 부정확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개적인 증언을 통해 공정하고 지적이며 정직한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편견 없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느낍니다. 이러한 대응은 물론 지방교회 관련 자료에 대해서만 입니다. 이 책은 우리를 이단적이고 사탄적인 집단들과 연관시키는 실수를 범했으며 우리는 결코 그러한 이단적인 집단들을 방어하는 것이 아님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우리는 우리를 생각의 통제, 세뇌, 생각이 없는 상태(mindlessness)와 연관시키는 비방에 대해서만 다룰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에 대한 비방들을 저자의 말 그대로 인용해서 말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의 생각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특히 새롭게 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생각에 대해서 증언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간증과 지방교회들의 실제의 가르침과 실행에 비추어 이 책에 적힌 비방들이 얼마나 부당하고 잘못된 것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거짓 비방

이 책의 저자는 지방교회들 안에서 실행되고 있다는 생각의 통제에 관해 두 가지 방법으로 비방하고 있습니다. 즉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일곱 집단 모두를 포괄하는 부분과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 대한 특정한 비방 부분이 그 둘입니다. 마인드벤더스의 저자는 생각을 왜곡시키는 것과 관련해서 일곱 집단 모두를 원칙상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세뇌나 생각 통제에 관한 일반적 진술은 모두 지방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저자의 의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지방교회에 있는 이들에 대해 “사람들을 삼일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복하게 하는 대신 사람들의 생각을 왜곡시키고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4] 마인드벤더스 16쪽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교적인 움직임들이 갖는 두렵고 소름끼치는 한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사람들의 생각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생각을 원하고 그 생각을 완벽하게 통제하길 원한다...그들이 생각을 통제하려는 목적은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세뇌(洗腦)이다.[ 5 ]

이러한 세뇌라는 비방의 효과는 이 단어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를 고려할 때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세뇌: “태도나 신념을 조직적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특별히 고문이나 약품, 심리적 압박감을 사용하는 방법”. [ 6 ] 세뇌는 더 나아가서 “모든 종류의 통제된 조직적인 사상 주입”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7 ]마인드벤더스는 “이러한 집단들이 실행하고 있는 생각의 통제는 전부 수십 년 전 한국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이 전쟁포로들에게 사용했던 방법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 믿어지며 그 결과 또한 똑같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8 ]

마인드벤더스에는 교회집회를 그린 삽화가 있는데 이 삽화에서는 집회를 “심리극(psycho drama)”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9 ]심리극이란 환자들이 감정적으로 격화된 상황을 즉석에서 극화하고 그 극에 직접 참여하는 집단 심리치료 방법입니다.[ 10 ] 이 삽화는 집회에 있는 사람들을 “최면술”에 걸린 것으로 묘사하고있고[ 11 ] 새로 개종한 사람은 “의지가 무너진”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12 ]

마인드벤더스의 저자는 지방교회에서 사용한다고 추정하는 생각 통제의 방법이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해리 크리쉬나, 혹은 다른 어떤 사탄적인 이단보다도 더 해롭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믿기로는 현대 종교의 장에서 지방교회의 세뇌, 혹은 왜곡이 그 어떤 이단들의 세뇌 보다 더 강력하며 오래 지속된다”고 말합니다.[ 13 ] 이 저자는 지방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그들의 생각 통제의 방법은 효과적인 만큼 위협적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의 정상적인 사용을 무의식적으로 상실하게 하는 어떤 것으로 시작된다”고 비방합니다.[ 14 ]

마인드벤더스에 따르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성경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대체한다”고 합니다.[ 15 ] 이 책의 저자는 “아무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16 ] 그는 “그들을 붙잡아 두는 것은 두려움인 것 같다”라고 말함으로 지방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안의 형제 자매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방합니다.[ 17 ] 이 책의 저자는 “내가 보기에는 두려움이 지방교회 안의 궁극적인 무기인 것 같다”라고 합니다.[ 18 ]

마인드벤더스의 저자에 따르면 지방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현실감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비극은 그들이 너무나 현실감을 잃어버린 나머지 그들이 사실상 생각이 없이도 이해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각은 무시되어야 하는 것이고 진정한 영적 이해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고 믿는 사람의 영은 “그리스도에게 참여하기 위해” 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19 ]

주님을 접촉하기 위해 사람의 영을 사용하는 것과 그분을 우리의 음식과 음료로 취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인드벤더스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윗트니스) 리는 ...생각은 적합한 기관이 아니고 사람의 영이 적합한 기관일 것이라고 가르친다. 자주 반복되어 강조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영을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생각을 사용해서 어떤 것을 이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말아야만 하고 ... 생각을 사용해 들은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사람은 생각이 아니라 영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이해해야 하며 생각은 혼의 부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긴다.[ 20 ]

마인드벤더스는 또한 위트니스 리가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이 생각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생각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는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것은 생각의 주요 고비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도록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사람은 그가 들은 것을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위트니스 리에게는 이익이다. 이런 경우에 사람은 그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득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그는 대체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21 ]

마인드벤더스는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산 인격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의식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22 ]

마인드벤더스는 지방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 막대한 정신적, 영적 유린을 당했다고 말하며 그의 지방교회에 대한 분석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23 ] 이 책은 지방교회 안에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결론을 맺습니다: “생각을 조종하는 이단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생각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24 ]

이러한 모든 비난들은 거짓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의 생각에 대해 실제로 믿고 실행하는 것들에 대해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인드벤더스라는 책과는 완전히 달리 우리의 믿음과 간증의 근원은 철학이나 심리학, 전통, 사람의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간증의 근원은 성령으로 감동된 언어인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진술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각에 관하여 많은 말을 했습니다. 생각에 관한 우리의 조망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부합하고, 마음의 타락한 상태나 새롭게 된 상태 모두를 향한 우리의 태도 또한 성경에 계시된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지방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이 사람의 생각의 기능에 대해서 어떻게 믿고 실행하는가를 진정으로 알기 원한다면 그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솔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아무런 유보 없이 기꺼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시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다음 몇 가지들을 고려해 보십시오: 생각의 정상적인 기능, 타락한 천연적인 사람의 생각, 회개와 생각이 새롭게 될 필요성(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또한 회개와 생각이 새롭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이 새롭게 됨을 체험하는 길, 새롭게 된 생각의 특징, 생각과 영의 관계 등입니다. 사람의 생각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을 숙고함으로써 여러분은 생각에 관하여 지방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믿는 것에 관해 정확한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빛 안에서 생각에 관해 믿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성경과 다수의 저자들의 글, 특별히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생각의 정상적인 기능

성경은 사람이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계시합니다(살전 5:23). 사람은 물질적이고 영적이고 심리적인 세 다른 세상들을 접촉하기 위하여 세 부분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몸의 다섯 가지 감각인 듣고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통하여 물질적인 세상을 접촉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통하여 영적인 세상
을 접촉합니다.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접촉하는 영적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존재의 심리적인 부분인 혼을 통하여 심리적인 세상을 접촉합니다.
[ 25 ] 혼의 주된 부분인 생각은 생각하고 근심하고(시13:2) 알고(시139:14) 기억하기(애3:20) 위함입니다. 생각은 또한 하나님과 영에 속한 것들에 관련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의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니”와 고린도전서 6장 17절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라는 말씀에서처럼 영이신 하나님을(요 4:24) 직접 접촉하는 것은 사람의 영이지만(슥 12:1)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이해가 생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 안에서 지혜와 영적 이해를 갖게 됩니다(골 1:9). 계시록 17장 9절의 말씀은 “지혜있는 뜻(mind, 생각)이 여기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생각이 직접적으로는 심리적인 세상을 접촉하지만 생각은 간접적으로 사람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과 영에 속한 것들을 접촉합니다. 여러 해 전에 한 형제님이 집회에서 간증한 것처럼 “생각의 기능은 영으로부터 온 느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명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으로 영접하고 생각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생각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을 반드시 영에 두고(롬8:6) 영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타락은 생각의 불순종하고 독립적인 행동에서 야기되었습니다. (창 3:1-6, 고후 11:3).

합당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생각의 정상적인 기능을 버리거나 격하시키지 않습니다. 이 생애에서는 비록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리고 “부분적으로 아나”(고전1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날 생각을 통해 어느 정도의 영적 이해는 갖고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영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요4:24) 우리의 영으로 섬긴다 하더라도(롬1:9) 여전히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이 열릴 필요가 있습니다(눅 24:45, 헬라어 참조). 더욱이 주 예수님 자신도 우리가 우리의 온 뜻(mind,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2:30). 생각과 이해를 포함해서 우리의 전 존재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명하고 맑은 생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바울이 말하길 하나님이 우리에게 근신하는 마음(딤후 1:7, spirit of a sound mind,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창세기에 있는 몇몇 어려운 구절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강한 영과 맑은 생각이 필요하다”라고 했습니다.[ 26 ] 우리의 영으로 우리는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있고 생각으로 우리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으며 지방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이것을 실행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제목의 책 안에 있는 다음 말을 숙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 안에 있는 직감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생각이 필요하다. 직감을 통해 우리는 내적인 지식의 느낌을 갖게된다. 그러나 영적인 느낌을 갖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영 안에서 느끼지만 그것들을 이해하는 것은 생각을 통해서이다.[ 27 ]

우리가 비록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에 관해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에 문제가 있어서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 안의 느낌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명확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 안에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 안에서의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우리 영 안의 직감의 기능을 통해서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생각 안의 이해의 기능을 통해서이다.[ 28 ]

생각의 기능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계시합니다. 주님의 뜻과 관련하여 주님의 얼굴을 찾고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영의 깊은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훈련된 생각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접촉하고 우리 영 안에 느낌을 갖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생각을 사용해 그분의 뜻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영 안의 느낌은 다만 알 수 없는 부담이 될 뿐 우리의 이해에 별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생각에 의한 이해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영적인 것에 있어 훈련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영역에 들어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도 없다.[ 29 ]

영에 속한 것을 아는 데에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이에 대해 위트니스 리는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책임은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 생각을 사용하고 생각을 영적인 것들에 두고 항상 영으로 돌이키며 그곳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생각이 항상 영적인 영역과 접촉하게 되기 때문에 민감하고 생생하게 영의 느낌을 이해하게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30 ]

이러한 위트니스 리의 언급들은 생각을 경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 생각이 없는 상태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로는 들리지 않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말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사용해야할 명백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매우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성경과 영적인 문제들을 아는데 사람의 영의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의 필요성과 합당한 기능 역시 인식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은 성령에 의한 빛 비춤과 인도하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기꺼이 진리의 영(요16:13)에 의해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되기를 자원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기 때문입니다(사 55:8-9). 사도 바울과 함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라고 간증하는 것은 겸손이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각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이해에 빛 비추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모세오경과 예언서, 시편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것들을 제자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들의 생각을 열어 주어야만 했습니다(눅 24:45). 오직 하나님이 열어주신 생각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에 기록된 바울의 체험은 영적인 문제에 있어 사람의 생각에 한계가 있음을 증거해 줍니다. 바울은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했습니다(25절). 바울의 생각 속에는 그의 천연적인 생명, 우리 모두가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체험에서 그는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증거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롬 7:23). 바울 자신의 간증에 따르면 그의 지체 속의 죄의 법이 그의 생각의 법보다 우세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해방, 그리고 우리의 해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의 역사와 우리가 생각을 영에 둠으로 협력하는 것으로 말미암습니다(롬8:2, 6). 사람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생각의 조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분명한 간증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생각을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정상적이고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지성이 잘못 인도되거나 아무런 인도도 받지 못할 때의 위험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G. H. 펨버(G.H. Pember)는 사람의 지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성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한 오류에 빠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위험하다. 왜냐하면 지성은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할 수 있고, 어두움을 빛이라 하고 빛을 어두움이라 할 수 있으며, 쓴 것을 달다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1 ]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사55:8) 우리는 성령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지적 능력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모사가 될 수 없었음과 만약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알려면 그분이 우리의 이해를 열어주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겸손입니다. 우리는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도 다른 모든 것에서처럼 우리를 창조하시고 능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신 분에게 합당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타락한 천연적인 생각의 상태

타락 당시 사람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뿐 아니라 사탄에 의해 내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영은 죽었고(엡2:1, 5) 혼은 자아가 되었으며(마16:24-26; 눅9:23-25) 몸은 육신이 되었습니다(롬7:18, 23-24). 지금 사탄의 본성인 죄는 우리 안에 거합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말했습니다(롬7:20). 이 내주(內住)하는 죄는 우리의 죽을 몸 안에서 왕노릇하고(롬6:12) 우리를 주관하고(롬6:14, 헬라어참조) 우리 안에서 살아나고(롬7:9)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속이고 죽이고(롬7:11)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행하게 합니다(롬7:17, 20).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히게 됩니다(롬7:23). 타락과 죄는 우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록 우리의 생각이 여전히 생각하고 분별하고 고려하고 상상하고 기억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독소가 퍼져있으며 현재 우리 육신의 죄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이들이 그의 타락한 천연적인 생각의 상태를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새롭게 되지 못한 생각의 상태를 제대로 보게될 때 우리는 생각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새롭게 되기 위해 주님을 간절하게 찾게되고, 우리의 온 존재와 우리의 생각은 대적의 손에서 회복되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처럼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쓰이게 될 것입니다.

천연적인 사람의 생각

천연적인 사람의 타락한 생각의 상태를 빛 비추는 여러 말씀들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은 “육에 속한 사람은(natural man, 천연적인 사람)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Natural(천연적인)”이라 번역된 헬라어 단어 프쉬키코스(psuchikos)는 “혼적인(soulish, soulical)"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혼의 영역 안에 사는 혼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관한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천연적인 생각은 혼의 부분이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빛 비춤을 받지 못한 천연적인 생각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의 일들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유다서에 따르면 그러한 사람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10, 19절. 헬라어참조) 야고보서 3장 15절은 천연적인 사람의 지혜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합니다. ”정욕적(sensual)"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천연적인(natural)"혹은 ”혼적인(soulish)"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혼적인 사람의 지혜가 귀신들에게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천연적인 사람의 혼의 부분인 천연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지 않고 그것들을 어리석게 여기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악한 말을 하며 세상적 지혜와 마귀적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속임을 당함

더욱이 천연적인 생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의 지배아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은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여기서 우리는 사람 안에서 사탄의 일이 두 방면임을 봅니다. 사람의 육체 안에서와 사람의 생각 안에서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 오기 전에 우리 모두는 비록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가 우리의 정신을 속이고 통제했습니다.

일부 구체적 특징

사람의 타락한 천연적인 생각의 구체적 특징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그것은 사악한 생각, 타락한 생각, 하나님께서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생각입니다(롬1:28). 그러한 생각은 허망한 것으로 가득 차있고 총명이 어두워져 있습니다.(엡4:17-18).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엡4:18, 헬라어 참조). 천연적인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합니다(골1:21). 천연적인 생각은 과장되어 “보지 않은 것들까지 참견합니다”(골2:18). 땅에 것들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골3:82). 더욱이 생각이 육에 있으면 하나님께 대적하는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치 않습니다(롬8:6-7). 타락한 생각은 부패했고 사람들로 진리를 대적하게 합니다(딤전6:5, 딤후3:8). 디도서 1장 15절에 따르면 천연적인 생각은 또한 더럽습니다. 제시 펜 루이스 여사는 “그러므로 우리는 천연적인 사람 안에서 어떻게 생각이 육에 의해 어두워지고 우쭐해지며 허망하고 헛된지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생각은 육신의 지배하에 있음으로 인해 육적이 되었으며 그 모든 행위는 보기에 좋든 악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32 ]

천연적인 생각(natural mind)에서 나온 생각들(thoughts)

천연적인 생각에서 나온 생각들은 타락한 상태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4절은 그러한 생각들은 완고하다고 했고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고 계시합니다(헬라어 참조). 사람의 천연적인 생각에서 나온 견해는 사실상 이 세상 신인 사탄에게 가려져 있습니다. 대적의 이런 가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이 사람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눈먼 생각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하여 커다란 내적 어두움을 산출합니다. 천연적인 사람의 생각들은 완고하고 가리워졌을 뿐 아니라 또한 사악하고 불순종합니다(마9:4, 고후10:5). 고린도후서 10장 4절과 5절은 이론과 견해를 가진 사람의 생각이 대적의 견고한 진이라고 계시합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헐려야 하며 불순종하고 반역적인 생각들은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되어야 합니다. 워치만 니는 “이것은 사람의 반역이 기본적으로 그의 생각 안에 있었음을 보여준다”라고 했습니다.[ 33 ]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우리는 천연적인 사람의 생각들이 하나님께 대적함을 볼 수 있습니다.

천연적인 생각의 의논들(reasonings)

사람의 천연적인 의논들에 대한 성경의 판단은 명확하고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의논들이 허망하고(롬1:21) 악하다고 합니다(마15:19). 고린도전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종교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천연적인 생각의 의논들과 어두워진 마음으로 주 예수님을 대적하여 분투하고 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의논했습니다(막2:6, 눅6:8). 마가복음 2장 8절은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영 안에서 살고 행하셨던 주 예수님은 종교적인 자들의 거역적이고 모독적인 생각의 의논들을 인지하셨습니다. 복음서들을 통해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종교적인 의논들로 공격했던 것을 봅니다. 즉 그들은 영 안에서 살고 행했던 분을 공격한 것입니다.

다수의 경건한 사람들도 사람의 천연적인 의논들(reasonings)에 대해 성경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펨버(G.H. Pember)는 “이성(reason)은 기껏해야 믿을 수 없는 기만적인 도구에 불과하며, 사람을 눈멀게 하는 오만은 상황을 훨씬 더 악화시킨다”라고 말했습니다.

[ 34 ] 믿는이들이든 불신자들이든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탐구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기를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 맥킨토쉬(C.H.Mackintosh)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지 말자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그 외에 어떤 결론이 있겠는가?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이 주셨을 때와 똑같지 않다. 죄가 들어왔고 사람은 타락한 피조물이 되었으며 이성과 판단과 이해 등 그의 온 도덕적 존재는 완전히 허물어졌고, 이러한 좌절과 파멸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 결과임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35 ]

이성이 정상적인 상태임을 가정하면서 맥킨토쉬는 “우리의 이성이 정상적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함으로 그 상태가 정상임을 증명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계속해서 그는 “그러나 이성은 정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눈멀고 완전히 왜곡되었다. 영적이거나 신성하거나 하늘에 속한 일들의 경우 이성은 잠시도 신뢰하지 말아야한다”라고 말했다.[ 36 ]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이성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달은 형제인 맥킨토쉬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보다 높고 이성을 능가한다. 하나님이 창조물 위에 계시고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이성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모든 의논들을 내던져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을 사용해 접근한다면 혼은 불가피하게 불신의 흑암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37 ]

18세기에 윌리암 로(William Law)는 사람의 이성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천연적 이성의 통로를 통해 받아들이는 모든 종교적 지식이 위대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허망함과 공허와 자기기만적 어리석음의 면에서 뛰어날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새롭게 깨닫게 된 자기 의지에 의한 삶은 타락한 본성의 모든 악하고 부패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삶은 천연적 이성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대적하는 반역을 계획하고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38 ]

윌리암 로는 이성의 합당한 사용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영적 영역에서 무력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볼 수도, 맛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들을 수도 없다....그리고 성경말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추론하는 것을 그분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에 대해 추론하는 것이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리에 맞지 않다.... 이성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을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사람의 혼과 영으로만 체험할 수 있다....이성은 물질적인 영역이나 영적인 영역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그 눈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러한 실제들의 체험을 사람의 몸으로 혹은 혼으로 가져올 수는 없다.[ 39 ]

천연적인 생각이 어떻게 영을 거스르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로(Law)는 교리와 성경말씀에 있어 우리가 이성을 신뢰하는 것의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교리와 성경말씀에 관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에 종교적 신뢰를 두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우리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은 본질상 우상숭배로서 태양이나 죽은 성인, 새겨진 형상에 종교적 신뢰를 두는 것보다 더 어리석다.[ 40 ]

로(Law)는 더 나아가 “이성이 설명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은 흑암의 왕국의 권세 아래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41 ] 로(Law)는 또한 “이성만을 믿는 사람은 뱀의 후손으로부터 왔고 바벨탑의 첫 건축자들에게 일어났던 혼돈의 참 후사들이다”라고 했습니다.[ 42 ]

워치만 니는 확실히 지적인 면에서 은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에 대한 체험에 있어서 천연적인 이성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을 이성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에 대해 워치만 니는 “하나님의 영광을 단편적으로나마 흘깃이라도 본다면 우리는 무릎을 꿇게될 것이며 이성을 내던져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만이 오만할 수 있다. 즉 흑암 속에 앉아 있는 이들만이 이성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43 ] 같은 점을 언급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담이 선악 지식의 나무를 먹은 이후 이성은 사람의 삶의 원칙이 되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후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단지 죽은 개이며 진흙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우리의 논쟁들은 그분의 영광의 빛 안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람이 영광 안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그 속에서 덜 의논할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속으로 의논을 많이 한다면 우리는 그가 결코 영광을 보지 못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44 ]

워치만 니는 하나님께서 종종 외관상 뚜렷한 이유가 없이 행하심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그분이 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종이고 여전히 그분을 경배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내가 만약 그분의 모든 길을 이해했다면 내 자신이 보좌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분이 나보다 아득히 높으심을 보았을 때 - 그분 자신만이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심 - 내 자신은 먼지와 재 속에서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고 내 모든 의논들은 사라졌다.[ 45 ]

성경말씀과 경건한 사람들의 지지적 간증들은 천연적인 사람의 생각(mind)과 생각들(thoughts)과 의논들에 대해 통렬히 고발합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은 타락했고 헛되고 어둡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교만하며 육적이고 부패했고 더럽혀졌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들은 사악하고 가리워 졌고 완고하며 불순종합니다. 우리의 의논들은 헛되고 악하며 주님과 그분의 움직이심에 반역적입니다. 천연적인 사람의 헛되고 어두운 생각은 심지어 “신(神)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여기기도 합니다.(행17: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라고 하셨습니다(고전1:19). 로마서에서 바울은 천연적인 사람의 타락한 생각의 상태를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요약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1-23, 25).

회개의 필요

만약 우리가 우리의 타락한 천연적인 생각(mind)과 생각들(thoughts)과 의논(reasonings)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는다면 신약의 복음서의 첫 단어가 “회개”라는 것이 놀랍지 않을 것입니다. 침례 요한과 주 예수님 두 분 모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라고 선포했습니다(마3:2. 4:17). 회개하라는 명령은 사람의 생각을 향한 것입니다. “회개”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로써 생각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해리 아이론사이드(Harry A. Ironside)는 “이것은 단지 옛 관념 대신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상 사람의 내적 태도의 완전한 반전을 의미한다”라고 했습니다.[ 46 ] 위트니스 리는 이 회개의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말합니다:

회개하는 것은 생각이 변하여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회개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철학과 논리가 바뀌는 것이다. 타락한 사람의 삶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따른다. 그의 존재와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그의 생각에 따른 것이다. 당신이 타락한 사람이었을 때 당신은 생각에 의해 지배되었다. 당신의 정신과 논리와 철학은 당신의 삶의 방식을 통제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타락한 정신의 지배 아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고 우리의 삶은 그분의 뜻과 정반대였다. 타락한 정신의 영향 아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져 갔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날 회개하고 생각과 철학과 논리에서 돌이키라는 복음을 듣게되었다.[ 47 ]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안에서 우리의 타락한 생각의 끔찍한 상태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됨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과 침례 요한의 말에서 회개하라는 명령은 왕국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주의하십시오. 단지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고 천당에 가기 위해 회개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 것은 천국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생각의 변화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천연적인 상태에서는 반역적이며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에게나 혹은 어느 것에게나 다스림 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사야서 55장 7절은 회개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찾고 그분께 돌이키길 갈망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방법과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말하길 여러분이 반드시 여러분의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뜻은 천연적인 생각과 관념과 의견들을 버리고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구현된 그분의 생각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생각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주님께로 되돌아가 그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이들이 구원을 위해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만 적용되는 사실이 아니라 매일 회개할 필요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각들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올 때에도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하와가 뱀에게 속았듯이 믿는이들의 생각도 그리스도로부터 떠날 수 있습니다(고후11:3).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주 예수님은 교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계시록 2장 5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3장 19절에서는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만이 그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이들 또한 회개하고 생각을 바꾸도록 주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생각을 새롭게 할 필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회개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며 더 이상 타락한 생각에 의해 시달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리와 거리가 멉니다. 사실상 현실은 처음의 회개가 완전하게 새로운 생각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성경과 우리의 체험은 피로 씻김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믿는이도 그들의 실제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구원받기 전과 똑같이 타락한 천연적인 영역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에베소서 4장 17절의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라는 바울의 말을 상고해봅시다. “이제부터는 ~ 행하지 말라(no longer)"라는 말을 주의 깊게 보길 원합니다. 이 단어들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행했던 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계속해서 똑같이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 아니라 이 가능성이 심각한 위험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제 너희가 생각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믿는이들에게 더이상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이 온전히 깨달은 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영 안에서 거듭날 수 있지만 그가 여전히 그의 일상생활을 그의 육신이나 천연적인 생각의 어두워진 이해를 따라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반복해서 믿는이들에게 영 안에서 행하도록 명했습니다(갈5:16).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분을 그의 존재 안으로 영접할 때에 그의 영은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주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6). 사람이 구원 받을 때 그는 생각과 마음의 변화 또한 체험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에 대해 전과 달리 생각하게 되며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생각이 새롭게 되었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의 말을 기억하십시오:“이제부터는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과 같이 하지 말라.” 같은 장 23절에서 바울은 믿는이들에게 “오직 심령으로(생각의 영, spirit of mind) 새롭게 되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에서 우리는 “생각의 허망한 것”과 “생각의 영”의 확연한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급히 요구되는 것은 생각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됨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무신론자들과 믿지 않는이들처럼 생각의 허망한 것에서 계속 행하며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으로 거듭났고 주 예수님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시며(딤후4:22) 비록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새롭게 되지 않은 천연적인 생각의 영역 안에서 실제적인 매일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많은 주님의 백성의 체험의 분명한 간증입니다.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음

바울은 또한 로마서 12장 2절에서 생각이 새롭게 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생각(mind)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 우리는 사람의 생각에 (하나님을) 상실한 생각(롬1:28),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려는 생각(롬7:25), 육이나 영에 놓여진 생각(롬8:6), 변화되고 새롭게 된 생각과 같은 다양한 상태가 있음을 봅니다.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은 이러한 변화 과정이 아직 완결되지 않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형제들이여 여러분들은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이미 다 변화 받았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격려했습니다. 새롭게 된 생각은 하나님의 선하고 기쁘고 온전한 뜻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 장 전체의 내용에서 이 구절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몸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새롭게 된 생각의 특징은 그 자신을 높이 생각지 않고 몸의 다른 지체들을 합당하게 존경한다는 것을 지적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과 로마서 12장은 둘 다 몸의 생활의 실제적인 깨달음을 다루며 생각을 새롭게 하라고 우리를 강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오늘날 이 땅에서 성취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새로워져야 하는데 단지 우리의 개인적인 영적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과 건축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사람의 천연적인 생각의 허망함을 보고 이 사실에 대해 단호하게 증거했던 것처럼 그들은 또한 생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사탄이 끊임없는 교묘한 술책으로 벌이고 있는 성도들에 대한 전쟁의 전략상의 중심”[ 48 ] 임을 깨달은 제시 펜 루이스(Jesse Penn-Lewis)는 생각을 새롭게 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많은 이들이 새 “마음”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낡은 “머리”를 갖고 있다. 대적은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통해 우리의 생각 안에서 붙잡고 있는 것이 있으며, 이것이 제해지지 않는 한 믿는이들의 삶에서 대적이 그들의 적극적인 봉사를 방해하고 공격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49 ]

제시 펜 루이스는 또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생각의 통제와 사용을 놓고 오늘날 큰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50 ] 그녀는 또한 하나님의 많은 헌신된 자녀들이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온갖 종류의 혼잡한 ‘생각’ - 새롭게 되지 않고 대적의 방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51 ]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그녀는 “하나님은 대적으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구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생각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반역적인 생각은 사로잡힌 바 되고 우리의 생각은 수정처럼 맑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52 ]

나는 생각을 새롭게 함에 대한 워치만 니의 말에 대해 아주 감사하게 여깁니다. 교회는 사람의 재능과 능력과 자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며 워치만 니는 생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정말 똑똑한 사람들을 만날지 모른다. 그들의 생각은 유난히 예민하다. 구원받기 전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사용해 철학과 과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구원받은 후에는 단순히 생각을 사용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민한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을 수 있다. 그것이 십자가에 의해 다루심을 받았는가? 성령의 통제아래 있는가? 아니면 그 생각은 그들이 원래 가졌던 생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땅에 속한 아담에게서 나왔고 그 자신 즉 사람의 본성에서 나왔으며 육신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은 비록 주제는 바꾸었지만 생각은 여전히 옛 생각 그대로이다. 그들이 이러한 옛 생각을 사용해 성경을 연구할 때 그들은 교회를 돕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53 ]

워치만 니는 특히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의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새롭게 되지 않고 혼돈된 생각을 의지해 성경을 읽는가! 그 열매는 그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그들은 거룩한 말씀의 영을 접촉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려 한다면 먼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에 의해 파쇄 되어야 한다.[ 54 ]

그는 또한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이 “대적이 역사하는 중심지이다.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은 사탄이 역사하는데 천연적인 입지를 제공한다”라고 말했습니다.[ 55 ]

위트니스 리의 글 중에는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의 필요에 대한 바울의 말에 대한 간증이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생각이 여전히 그들과 똑같을까 염려된다”라고 말했습니다.[ 56 ] 로마서 12장 2절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당신은 거듭났다. 하지만 당신의 생각은 새롭게 되었는가? 당신은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옛 생각을 갖고 있는가? 만일 당신의 생각이 여전히 낡은 것이라면 우리의 혼이 변화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영 안에서는 거듭났지만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서는 여전히 낡았을 수 있다. 우리의 생각과 사랑과 선택에는 변화가 없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과 똑같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는 영 안에서 거듭났고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혼에 관한 한 우리의 생각하는 법과 사랑하는 법과 선택하는 법이 그들과 같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57 ]

새롭게 된 생각과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의 차이

생각이 새롭게 되는 길과 새롭게 된 생각의 특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새롭게 된 생각과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의 차이를 지적하겠습니다. 그 차이는 아주 큽니다.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새롭게된 노우스(nous 생각을 나타내는 헬라어)와 새롭게 되지 않은 노우스의 차이는 정말이지 반짝이는 유리창과 더러운 유리창의 차이와 같다. 믿는이의 새롭게 되지 않은 노우스는 새롭게 된 노우스가 생각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새롭게 된 생각은 사고력이 적어도 몇 배는 증가할 것이다. 사고력은 크게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롭게 된 노우스와 새롭게 되지 않은 노우스의 차이는 삶과 죽음, 하늘과 땅과도 같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추구했을 때와 같은 열정으로 우리의 노우스를 다룬다면 우리는 열린 하늘 아래서 살게 될 것이다.[ 58 ]

확실히 이것은 강하고 분명한 진술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상당한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에게서 온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가 지적하기를 새롭게 된 생각은 우리의 생각들에도 변화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 안에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우리 혼의 내적 부분이 그리스도로 주입되고 그분자신으로 적셔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혼은 바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생각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고려하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새롭게 된 생각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표현할 것이다. 그후 우리의 생각의 이해는 영적이 될 것이며 생각이 우리의 영 안에서 느끼는 일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 될 것이다.[ 59 ]

주님 안에서 생각이 새롭게 됨에 대해 많은 체험을 갖고 계신 형제님들의 이러한 간증은 참으로 우리가 부지런히 그리고 진정으로 이것에 대해 주님께 구하도록 격려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우리의 영의 기능이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고, 우리의 몸은 우리가 물질적인 세상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혼의 기능은 주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눅1:46). 우리가 더욱 변화되고 더욱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형상으로 변한다면 우린 더욱 그분을 표현할 것입니다(고후3:18). 얼마나 높은 부르심이며 영광스러운 특권인지요! 그러나 우리의 혼이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주님을 확대하고 표현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생각이 새롭게 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과정

그러면 생각이 어떻게 새롭게 됩니까? 이것은 절대로 마인드벤더스의 저자가 우리의 실행에 대해 비방하고 있는 것처럼 세뇌나 생각의 속임수나 외부의 통제의 형식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지방교회들과 위트니스 리의 사역 안에 그러한 실행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방교회들과 위트니스 리의 사역 둘 모두는 믿는이들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주님의 생명의 내적 역사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변화 받는 것은 생명 안에서 신진대사적인 변화를 거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강압이나 생각의 속임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영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실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엡3:17. 헬라어참조).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양심으로 구성된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집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각 안에 그분의 거처를 더 정하면 정할수록 우리의 생각은 생각들과 의논들과 기억과 상상 등과 더불어 더 새롭게 됩니다.

생각이 새롭게 되는 과정에 대한 중요한 구절은 에베소서 4장 23절입니다. 이 구절은 “오직 심령으로(spirit of mind,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합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데 있어서의 십자가의 기능을 논하며 제시 펜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이 온전히 새롭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못 박혔음”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옛 사람은 낡은 육신의 어두워진 육적인 생각을 포함한다. 이것은 에베소서 4장 17절과 18절의 어둡고 허망한 생각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에 뒤이어 22절과 23절에 분명하게 나와있다. 바울은 믿는이들에게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기”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명령한다. 먼저 우리는 생각의 원래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하며 개종 당시 “생각의 변화”가 사고의 영역과 정신적 활동 면에서 대적으로부터 혼을 구원해 낼만큼 깊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리고는 그리스도 앞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오기 위하여 낡은 육신의 생각에서 “옛 사람”을 신중하고 철저하게 “벗어 버려야한다.” 그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이 십자가에서 벗어 버려야할 옛 창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60 ]

위트니스 리는 또한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따라 생각이 새롭게 됨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합니다:

옛 사람을 벗는 것은 십자가의 역사이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부활의 역사이다. 십자가의 역사와 부활의 역사 사이에 23절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가 있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은 부활과 함께 십자가의 역사를 포함한다.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이 제해지고 부활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목적지가 아니며 목적지인 부활로 인도하는 과정이다....천연적인 생각에 대하여 죽는 것은 부활의 생각으로 이끈다. 즉 우리는 부활 안에서 새롭게 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새롭게 된 생각은 영 안에 있고 영의 통제 아래 있다. 영으로 가득 차있고 영으로 충만하다. 그리하여 영은 생각의 영이 된다. 그후 우리의 생각은 단지 새롭게 되는 것 뿐 아니라 영적 이해를 갖은 영적 생각이 될 것이다.[ 61 ]

영의 생각과 생각의 영

생각이 새롭게 됨으로써 생각의 영이 되려면 생각은 반드시 영과 함께 서야 합니다. 로마서 8장 6절은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말합니다. 우리는 육의 생각을 갖고 있거나 영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은 중립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육에 협력하면 육의 생각이 되고 영에 협력하면 영의 생각이 됩니다. 만약 우리의 생각이 영에 복종하면 영에 의해 통제 받고 영의 생각이 됩니다.[ 62 ]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영과 함께 서기 때문에 그 영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고 생각을 적시고 ‘생각의 영’이 될 것입니다.” 영이 생각을 다스리고 적실 때 영은 생각의 영이 됩니다.[ 63 ] 우리의 생각이 영에게 순복하면 영의 생각이 되고 우리의 영이 우리의 생각을 적실 때 생각의 영이 되어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게 됩니다(고전2:16). 위트니스 리는 어떻게 우리의 생각이 그리스도의 생각이 되는지에 관하여 도움이 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영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영에 순복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의 영으로부터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장될 기회를 얻는다. 전에는 그리스도에 속한 어떤 것도 우리의 생각 안에 없었지만,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영에게 순복할 때 주님은 그분 자신으로 우리의 생각을 적시고 채우시며 새롭게 할 기회를 얻으신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의 혼은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된다.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로 가득 찰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6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mind, 생각)을 가졌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영 안에서 거듭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이 영에 순복하고 그 영이신 그리스도가 생각을 점유하게 하면 우리는 심지어 그리스도의 생각도 가질 수 있다.[ 64 ]

생각을 영에 둠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됨이 필요하고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함으로 생각이 새롭게 된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을 영에 두는 것입니다(롬8:6). 오직 생각을 영에 둠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우리의 생각으로 스며들며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생명 나무와 선악 지식의 나무 중에서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역시 선택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 생명과 평안을 택하거나 아니면 생각을 육에 두어 사망을 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6, 7절에 따르면 육에 둔 생각은 사망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매순간 그의 생각을 어디에 두는 지는 실제적인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각이 사탄과 하나됨

마태복음 16장 21-26절은 믿는이의 생각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생각의 부적당한 사용으로 우리가 사실상 사탄과 하나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는 사탄 자신의 실제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2, 23절을 잘 살펴봅시다. 주님이 21절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후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새 미국 표준 영어 성경은 23절을 “돌아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나에게 걸림돌이 구나 네가 생각을 하나님의 권익에 두지 않고 사람에게 두는도다”라고 번역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에서 주님을 책망하며 그분이 그분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안을 할 때 베드로의 생각은 사람의 일에 관심을 두었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는 사실상 사탄의 체현인 의견,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이키시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셨는데 이는 그 때 베드로가 생각 안에서 사탄과 하나였고 사탄의 실제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어떻게 사탄과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이 구절 뒤 24절에서 주님은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25절에서는 목숨(soul life, 혼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에는 네 가지가 연결되어 있는데 사탄과 생각과 자아와 혼 생명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자아로부터 말했고 그의 생각을 사람의 일에 두었기 때문에 그의 말 역시 사탄의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일에 우리 생각을 두고 자아로부터 말할 때 우리는 사탄과 하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꾸짖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과 함께 서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서는지는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아버지로부터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계시도 받았습니다 (마16:16-17). 그러한 베드로가 사람의 일을 생각함으로 실제적인 면에서 사탄과 하나될 수 있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말씀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아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일에 두고 사탄적인 의견과 우리의 자아를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위해 말하려 할지라도 우리의 말은 사탄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보는 것은 우리가 생각을 영에 두고 영이 우리의 생각에 스며들고 생각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변화 받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할 것입니다.

새롭게 된 생각의 특징들
하나님을 신뢰함

신약에서 우리는 새롭게 된 생각의 많은 특징들을 봅니다. 그 하나는 새롭게 된 생각은 그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새롭게 된 생각과 하나인 바울은 아무것도 그 자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고후1:9)

모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열려있음

새롭게된 생각의 또 다른 특징은 모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는 “따라서 열린 생각은 영적 생명에 가장 중요하다. 만약 우리의 두뇌가 진리에 대해 편견으로 가득하다면...진리는 머리 속으로 들어올 수 없고 우리의 생명으로 연장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65 ] 닫힌 생각에 대하여 언급하며 그는 “닫힌 생각은 진리가 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다. 닫힌 정신에는 편견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관념과 다른 것은 무엇이든 반대하고 비평한다.”[ 66 ] 제시 펜 루이스는 “어떤 사람이 그가 이해하지 못한 진리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면, 반드시 그것은 낡은 생각의 활동이 그에게 어느 정도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습니다.[ 67 ] 닫힌 생각은 진리에 대해 편견이 있고 받아들이길 거절하지만 열린 생각은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이 열린 생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으로부터 나옵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삼중의 열림이 있습니다: 눈이 열리고(31절) 성경이 열리고(32절) 생각이 열립니다(45절, 헬라어 참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제자들은 이 삼중의 열림을 체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눈이 열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성경이 열려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게 주님이 말씀 하셔야 하며 우리의 생각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활생명이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생각이 더욱 새롭게 될수록 우리의 생각은 모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더욱 열릴 것입니다. 비록 이 진리가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과 의견과 서로 모순된다 하더라도 그럴 것입니다.

파해진 이론과 사로잡힌 생각

새롭게 된 생각의 또 다른 특징은 고린도 후서 10장 4절과 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새롭게 된 생각의 두 가지 특징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론(reasonings)의 견고한 진이 정복되어 주님께서 대적의 손으로부터 생각을 구하신 것이고 둘째는 생각이 사로잡혀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된 것입니다. 천연적인 생각은 이론들로 대적의 견고한 진이 되었으며 생각들은 이러한 이론들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새롭게 된 생각 안에서 이론의 견고한 진은 정복되었고 생각들은 사로잡혔습니다. 사탄의 견고한 진으로서의 생각에 대해 제시 펜 루이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의 견고한 진은 “이 시대의 신”과의 “전쟁”에서 전략적 중심지이다. 왜냐하면 주로 생각을 통하여 이 시대의 신은 포로된 자들을 그의 권세 안에 붙잡고 있으며 포로된 자들의 생각을 통하여 그가 (1)그의 독을 다른이들의 생각안으로 주입시키고 (2)하나님에 대항하여 반역하도록 그의 계획과 책략을 주입하기 때문이다.[ 68 ]

새롭게 된 생각과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새롭게 된 생각 안에서는 모든 생각들이 그리스도께 복종되었습니다. 그러한 구출과 새롭게 함이 있을 때 우리의 생각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생각이 그분과 하나입니다. 워치만 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사탄이 세운 생각의 견고한 진을 파하고 사람의 생각들을 다시 사로잡아서 그를 하나님께 자진하여 종이 되게 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을 그리스도로부터 독립적으로 생각지 않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해방이다.[ 69 ]

하나님은 얼마나 이와 같은 생각의 순종을 갈망하시는지! 워치만 니는 또한 다음과 같이 간증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의견이나 이론이나 불평이나 욕설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날을 하나님은 창세부터 기다리셨다.[ 70 ]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순복한다는 생각에 움찔한다면 이것은 여전히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으며 생각들이 여전히 반역적임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생각이 새롭게 됨을 체험한 사람은 “과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 사는 것에서 자유를 발견했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생각들이 다시 사로잡혀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진정한 자유를 찾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1 ] 이러한 자유와 새롭게 됨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생명과 평안으로 충만함

로마서에서 우리는 새롭게 된 생각의 몇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과 평안이 가득한 생각인데 그것은 생각을 영에 두었기 때문입니다(롬8:6). 이것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는 이사야서 26장 3절을 상기시켜 줍니다.

변화됨

새롭게 된 생각은 변화된 생각이며 생명의 영의 내적 역사를 통한 신진대사적인 변화를 거친 생각입니다.

자연히 지혜롭게 생각함

새롭게 된 생각은 또한 자연히 지혜롭게 생각하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롬12:3). 같은 장 16절에서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된 생각은 교만하게 생각을 높은 곳에 두지 않고 자기를 낮춥니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함

새롭게 된 생각은 “의심하는 바를 논쟁”(doubtful disputation, 롬14:1)하지 않고 다른이들이 주님 안에서 그들의 자유를 갖도록 허락합니다. 로마서 14장 5절에서 바울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롭게된 생각의 합당한 관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르게 실행하는 사람들을 비평하지도 않고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기의 방법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자유를 줍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스에 관하여 빌레몬에게 편지를 쓸 때 이러한 생각을 보여주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었지만 사랑으로 인해 그에게 간청하였고(8-9절) 빌레몬의 의견 없이는 그 무엇도 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롭게 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의 권위를 사용하여 다른이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인해 그는 다른이들의 의견을 알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새롭게 된 생각의 이러한 특징이 지방교회 안에서 아주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며 특히 생명과 위트니스 리의 사역 안에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마인드벤더스에 나타난 위트니스 리가 “자율적 독재자(autonomous dictator)"[ 72 ] 라는 비방은 완전히 거짓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각

새롭게 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빌2:5). 빌립보서 2장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비우고 낮추었으며 하나님에 의해 높히심을 받은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며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그 영의 스며듦

우리가 이미 지적한바와 같이 새롭게 된 생각은 그 영이 스며든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은 “영의 생각”이 되고 우리의 영은 “생각의 영”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소유하기를 갈망하십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의 박탈”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는이의 마음과 혼 안에서의 성령의 내적 역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영이 우리의 생각을 점유하고 생각을 통해 표현되기 위해서는 생각 안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제시 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생각이 그 영의 전달수단이라면 하나님의 영이 생각을 완전히 소유하고 모든 “반역적인 생각”을 그리스도께 사로잡아 복종케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영 안에 거하는 성령은 표현을 위한 통로로서 생각이 필요하지만 생각이 막혀있고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어 성령이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전달하지 못할 수가 있다. “막힌” 생각은 영이 표현되지 못함을 의미하고 영이 표현되지 못함은 하나님의 영이 다른 이들에게로 흐르는 것이 차단되었음을 의미한다.[ 73 ]

하나님의 영은 그분 자신을 우리 위로 혹은 우리 안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침례 때에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처럼 그 위에 임했습니다. 그 영은 또한 우리 안에서도 온순한 비둘기처럼 역사합니다. 그분과 지방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들은 어느 누구도 생각의 기능을 잃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믿는이가 자발적으로 그 자신을 그 영께 맡겨서 그의 지성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그 영이 생각 안으로 퍼지고 생각을 새롭게 하고 흘러 넘쳐서 다른 이들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생명 주는 말씀을 공급하기를 많은 인내로 기다리십니다. 그 영으로 적셔진 생각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얼마나 신선한지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각과 견해를 표현할 때 우리는 주의 영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들의 생각이 영의 규제와 지시아래 있기 때문에 주의 영은 그들의 생각을 적시고 점유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74 ]

위엣 것을 생각함

생명 주는 영에 의해 스며들고 새롭게 된 생각은 확실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골3:1, 2). 새롭게 된 생각을 위엣 것에 둠으로써 믿는이는 체험적으로 그의 승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

새롭게 된 생각에 관한 특별히 귀한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6절에 나옵니다. 이 구절은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헬라어 참조)라 했습니다. 자매구절인 히브리서 8장 10절이 나타내듯이 이것이 이루어 질 때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주님이 그분의 법을 우리 생각에 새겨 넣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내적이고 주관적인 지식을 얻습니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외적인 선생이 필요 없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모두 내적으로 주님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8장 11절은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새겨진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새롭게 된 생각의 뛰어난 특징입니다.

영적 이해의 소유

그 영의 스며듦과 그 분의 법을 새김으로 주님이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실 때 우리는 참된 영적 이해를 얻습니다. 우리는 “모든 신령한 지혜(spiritual understanding, 영적 이해)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집니다(골1:9). 영적 이해에 대해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이러한 새롭게 하는 역사는 먼저 우리의 영 안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혼으로 확장되며 우리의 생각의 이해를 새롭게 하여 우리가 영의 일들을 알게 한다. 우리의 생각의 이해가 성령에 의해 새로워질수록 우리는 영적인 일들과 하나님의 뜻을 더 이해할 수 있게된다[ 75 ]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이해함

새롭게 된 생각의 이러한 영적 이해는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을 줍니다. 기름부음의 가르침은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타나있습니다. 이 구절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기름부음은 우리 안의 성령의 움직이심이고 기름부음의 가르침은 안에 있는 그 영의 이러한 움직이심에 대한 생각을 통한 해석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은 반드시 합당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기름부음의 가르침과 생각의 이해에 관한 논의에서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름부음의 가르침은 영 안의 기름부음에 대한 생각을 통한 해석과 이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영 안에 예민한 느낌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영적이며 숙련된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생각은 생각이 새롭게 되고 영적인 문제를 이해하며 영적 지식을 쌓는 것을 포함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며 교통 안에서 살고 성경을 연구하며 영적인 책들을 읽고 메세지들을 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의 생각은 영적으로 수건을 벗게되고 지식에서 풍성해질 것이며 우리의 영 안의 기름부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깨닫게 될 것이다.[ 76 ]

이 시점에서 나는 지방교회들 안에 있는 이들에 관한 마인드벤더스의 진술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비극은 그들이 너무나 현실감을 잃어버린 나머지 그들이 사실상 생각이 없이도 이해한다고 믿는 것이다.”[ 77 ] 이러한 글은 저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쓴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그 저자야말로 생각을 왜곡시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가 지방교회나 위트니스 리의 사역에 대한 글들을 더 쓰기 전에, 독자들의 생각을 왜곡시키려고 노력하지 말고 정직하고 철저하고 편견 없고 열린 생각으로 조사를 수행하고 결론을 제시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의견이 하나님의 말씀이 됨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새롭게 된 생각의 또 다른 특징을 더 보여줍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처녀들과 관련하여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25절, 헬라어 참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구하지 않고 자기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고린도전서 7장 26-39절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의 의견을 말한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낸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생각은 새롭게 되고 그 영으로 채워져서 그의 의견조차도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하며 이 장을 결론지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주님이 말씀하시길”이란 확신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로 가득 찬 사람의 의견이 주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을 봅니다. 그의 의견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도록 그의 생각 안에서 일어난 변화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천연적인 생각의 의견은 사탄의 체현과 표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자신의 의견이 하나님의 말씀인 사람이 있습니다! 새롭게 된 생각의 특징은 얼마나 놀라우며 믿는이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새롭게 하는 능력에 대한 얼마나 놀라운 간증입니까!

한 생각과 한 의견

새롭게 된 생각에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일 것입니다. 새롭게 된 생각은 다른 믿는이들의 생각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새롭게 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의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서 했던 말을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이들에게 한 생각과 한 뜻을 가지라고 간청합니다. 한 지방의 믿는이들이 같은 관념을 갖는 것은 바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상적이며 교회의 실제적인 하나를 지키는데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생각의 하나에 대한 말씀은 여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15장 5절은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라고 말합니다. “뜻이 같게 하여(to be likeminded)”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같은 것을 생각함(to mind the same thing)"입니다. 로마서 12장 16절에서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라고 말하며 믿는이들을 격려했습니다. 이것 역시 헬라어의 문자그대로의 의미는 “같은 것을 생각함”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1절에서 바울은 믿는이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며”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0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모든 교회들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희망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그들이 어느 것도 다르게 생각하지 말기를 기대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4절에서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헬라어로 “같은 것을 생각하라”와 “한 가지를 생각하라”입니다. 빌립보서 3장 15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라고 하고 16절에서는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4장 2절에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간청했습니다. 헬라어로 보면 그는 “주님 안에서 같은 것을 생각하라”고 그들에게 간청한 것이었습니다. 반복해서 바울은 믿는이들에게 한 생각을 갖고 같은 것을 생각하라고 호소합니다. 그가 생각의 통제를 사용했습니까? 그가 세뇌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까? 그러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지방교회들이 그런 악한 실행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방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외적인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안에 거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내적 역사입니다. 우리 모두가 편견과 치우침과 자아를 부인하고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께 돌이킬 때 우리는 즉시 같은 생각과 심지어는 같은 의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찰스 웨슬리의 찬송 중 하나가 이러한 하나됨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달콤하게 연결될 때
(어린양을 진실하게 좇는 이들)
그들은 마음과 생각 안에서 하나
그들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말하네
모두가 사랑 안에서 함께 거하네
이 위안을 말할 수 없네
영광스러운 하나됨

첫 지방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은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라고 합니다. 주님은 죽기 전의 기도에서 우리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요17:23, 헬라어 참조) 세상이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의 그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됨을 바라볼 때 세상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음을 믿고 알게될 것입니다(요17:21, 23).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요17:22). 주님이 그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됨을 오늘날 영과 마음과 혼과 생각과 의견에서 하나됨을 통하여 실현시키시기를 기도합니다! 생각이 새롭게 됨으로 그러한 영광스러운 하나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새롭게 된 생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인 진정한 몸의 생활의 실행을 입증할 것입니다.

영과 생각

결론을 내리기 전에 영과 생각의 관계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낍니다. 하나님은 영과 생각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고 두 가지 모두 합당하고 정상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영의 기능은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롬1:9). 우리는 영 안에서 주님과 교통합니다. 영 안에 신성한 계시가 있고(엡1:17) 영 안에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갑니다(엡2:22, 헬라어 참조).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 채워졌고(엡5:18, 헬라어참조) 영적 싸움의 기도도 합니다(엡6:18, 헬라어 참조). 성령은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하십니다(롬8:16, 딤후4:22). 매일의 삶에 필요한 은혜는 또한 우리의 영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갈6:18). 오직 영 안에서 살고 경배하고 교통하고 일하고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마인드벤더스의 거짓 비방과 달리 지방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성경 말씀에 따라 생각에 중요한 기능이 있음을 믿습니다. 생각 안에서 우리는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고 파악하고 해석합니다. 생각을 통해 영의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말함으로 교회를 건축합니다.(고전14:14-19, 헬라어 참조) 그러나 원래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은 영이시고 생각 안으로 직접 받아들이는 사상이나 관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도 또한 영의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집회 안에서의 방언의 오용에 대해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생각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생각으로 찬미하리라”(헬라어 참조)라고 말했습니다. 지방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바울의 예를 따릅니다. 집회에서 우리는 영으로 또 생각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영으로 또 생각으로 찬미합니다. 사실 합당한 교회 생활의 모든 방면은 영과 생각의 문제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단순하고 명쾌한 다음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영의 직감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실 때 생각의 이해는 즉시 그것을 이해한다. 우리에게 강하고 기민한 영에 더하여 새롭게 된 분명한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의 모든 인도와 계시의 충만한 내적 지식을 가질 수 있다.[ 78 ]

바울은 우리에게 영과 생각이 모두 필요하다고 했고 바울에 동의하여 위트니스 리는 우리가 “강하고 기민한 영에 더하여 새롭게 되고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과 함께 생각을 사용하는 것이, 영을 떠나 단순히 천연적인 생각의 영역 안에서 기능하는 “생각(mind)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과 그리스도인들의 체험 둘 모두는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영을 고려하지 않고 생각을 사용하여 종종 영 안의 주님의 내적 느낌에 저항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엡4:30). 우리가 “생각에서 나와”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천연적인 생각의 영역으로부터 나와 생각을 영에 두어 살아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분을 접촉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관념화하는 것은 그분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영 안에서 그분을 접촉함과 동시에 새롭게 된 생각 안에서 그분에 대한 영적 이해를 받아 그분을 아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눈의 기능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눈으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앉아서 스테이크를 보며 그것에 대해 논하기만 할 때 친구가 “그만 바라보고 음식을 먹지”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이 그의 친구가 더 이상 그의 눈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입만 사용하라는 이야기입니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까! 만약 마인드벤더스의 저자가 그의 생각만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접촉했다면 그것에 대해 간증하고 성경구절을 인용해 뒷받침 해보라고 하십시오. 성경과 우리 체험의 간증을 따르면 우리는 영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에 둔 새롭게 된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합니다.

마인드벤더스의 저자는 단지 생각으로만 혹은 주로 생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 구원은 “생각으로 받고 믿는” 어떤 것입니다.[ 79 ] 그렇다면 구원이 생각의 수준에서 누리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영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중요합니다.(고후4:4) 그러나 새로운 출생이 일어나는 곳인 우리의 영(요3:6) 또한 중요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에 관한 마태복음 5장 6절을 인용하며 마인드벤더스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지적인 태도이다. 생각의 적극적 사용이 없이는 그러한 태도를 가질 수 없다. 의를 원하는 것은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게 하려면 당신은 생각을 사용해야만 한다.[ 80 ]

물론 생각이 관련되어있지만 그것이 전부일까요?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음식과 음료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필요는 단지 생각이 아니며 보다 깊습니다. 주리는 고통이 그의 존재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습니다. 생각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처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인 영도 그러합니다.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중 한 무리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적극적으로 의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의는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입니다(고전1:30). 우리는 생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과 마음과 온 존재로 의를 구합니다. 윌리암 로(William Law)의 다음의 말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성(理性, reason)은 음식이 아니며 음식을 대신할 수도 없다고 선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음식에 대한 논의(reasoning)의 적(敵)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잘못된 것일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이성은 빛도 생명도 사랑도 아니며 사람의 혼이나 영 안에서 빛, 생명, 사랑을 대신할 수도 없다고 선포했다고 해서 그를 영적 영역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적이라고 비난하는 것 또한 어리석고 잘못된 것입니다.[ 81 ]

내가 메뉴판을 읽을 때 나는 내 눈을 사용해서 보고 생각을 사용해서 생각하고 의지를 사용해서 결정합니다. 하지만 내가 식사를 할 때 나는 주로 내 입을 사용해서 음식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소화기관이 그것을 소화시킵니다. 내가 음식을 먹을 때 나는 또한 체험을 통하여 그것에 대한 지적 이해를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자신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생명을 얻고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 반드시 그분을 먹고 마셔야만 합니다(요6:51, 53-57). 영이 영적 음식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님을 먹는다고 증거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단순히 그분을 생각하는 것은 그분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중 수 천명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교파들 안에서 굶주리며 메뉴판을 바라보거나 음식에 대한 간접적인 설명을 들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과 사탄에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지방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음식에 대해 배울 뿐만 아니라 먹고 누리고 소화시키고 음식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살아있는 방식으로 주님을 음식으로 취함으로써 우리의 생각이 안으로부터 새롭게 됩니다.

우리의 간증은 우리가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고 그분 앞에 행하며, 우리 안의 생명의 영을 통하여 매일 새롭게 되고 있는 우리의 생각을 사용해서 영의 일들을 알고 해석하고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 없는 상태라거나 생각의 통제의 피해자라는 비방은 거짓이며 우리는 그것을 부인합니다.

개인적 간증

제가 개인적인 간증을 하겠습니다. 저는 결코 뛰어나게 지적인 사람도 아니고 지적으로 은사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강한 학문적인 배경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웨인 스테이트 대학(Wayne State University)을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고 프린스턴 신학대학(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는 조직 신학 분야에서의 뛰어난 성과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교육을 받는 동안 저는 제 생각을 사용해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갖고 있던 지식들이 저를 분명 교만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1962년에 주님에 대한 깊은 배고픔으로 저는 성령의 체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영을 체험했으며 저의 교만은 무너져 내렸고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생활로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바로 전 2년 동안은 주님이 계속해서 저를 겸손하게 하셔서 제 존재는 그분의 순수한 말씀의 진리에 대하여 아무런 제한 없이 열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교회생활 안에서 11년 정도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과 사람과 사탄 앞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어떠한 형태의 생각의 통제(mind control)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일들에 관해 제 생각을 바꾸었지만 특정인이나 사람들이 권유하거나 강요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의 책망과 살아있는 말씀의 빛 비춤과 주님 앞에서의 회개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수백명 아니 수천명이 비슷한 간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독재자를 따르는 생각 없는 믿는이들의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고려하는 기관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으로 인해 우리는 타락한 사람의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에 대한 그분의 말씀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전 1:19)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에게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논의의 헛됨과 우리 생각들의 불순종에 관한 그분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설득 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빛 비춘 것은 그 영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합당한 지적 활동이 결여된 지적 광야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활동적이고 매일 새롭게 되는데 바깥의 통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내적 역사를 통해서입니다(골3:4).

저는 왜 마인드벤더스의 저자가 그러한 거짓 비방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는 생각이 여전히 새롭게 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으로 인해 합당하게 분별하거나 영적인 것들, 특히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거나 전통적인 관념들에 반대되는 것들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보다 심리학적 지식을 더 신뢰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지 아닌지는 지금 이 시대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의 비밀들이 드러나고 심판 받을 때(고전4:5, 고후5:10) 주님께서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모든 무익한 말들이 심문 받고 우리는 우리의 말로 인하여 의롭게 되거나 정죄 받을 것입니다(마12:36-37).

주님의 임재 안에서 간증도 했고 지방교회들을 대표하여 답변의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에 영과 혼과 몸을 창조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분 자신으로 채우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타락한 생각의 통탄할 상태를 들어내시고 그분의 경륜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어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생각이 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많은 겸손케 하는 공과들을 체험했고 의심할 여지없이 더 체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그리 할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분께로 완전히 회복되고 소유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구속되고 그분의 생명으로 가득 채워져서 이 땅에서 오늘날 그분의 살아 있는 몸으로 조성되어 그분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왜곡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생각이 왜곡 당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타락으로 인해 더럽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처럼 피로 씻음 받고 그 영으로 거듭난 믿는이들입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는 그분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를 위해 새사람을 입으려고, 생명 안에서 우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도록 주님과 협력하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혼과 생각을 다해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영과 또한 생각으로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을 섬깁니다.

각주
  1. Jack Sparks, The Mindbenders (Nashville and New York: Thomas Nelson Inc., Publishers, 1977), p. v.
  2. Ibid., p. 15.
  3. Ibid., p. 16.
  4. Ibid., p. vi.
  5. Ibid., p. 16.
  6. _______ The Random House College Dictionary (New York: Random House, Inc., 1973), p. 163.
  7. Ibid.
  8. Sparks, op. cit., p. 17.
  9. 9. Ibid., p. 219.
  10. Random House College Dictionary, op. cit., p. 1068.
  11. Sparks, op. cit., p. 220.
  12. Ibid., p. 221.
  13. Ibid., p. 226.
  14. Ibid.
  15. Ibid., p. 227.
  16. Ibid., p. 231.
  17. Ibid.
  18. Ibid., p. 232.
  19. Ibid., p. 233.
  20. Ibid., p. 239.
  21. Ibid., p. 240.
  22. Ibid., p. 227.
  23. Ibid., p. 252.
  24. Ibid., p. 253.
  25. Witness Lee, The Parts of Man (Los Angeles: The Stream Publishers, 1969), p. 10.
  26. Witness Lee, Life-Study of Genesis, Message Ninety-nine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77), p. 1267.
  27. Witness Lee, The Economy of God (Los Angeles: The Stream Publishers, 1968), p. 81.
  28. Ibid., p. 82.
  29. Witness Lee, The Experience of Life (Los Angeles: The Stream Publishers, 1973), p. 183.
  30. Ibid., p. 184.
  31. G. H. Pember, Earth’s Earliest Ages (Old Tappan: Fleming H. Revell Company), p. 109.
  32. Jessie Penn-Lewis, The Battle for the Mind (Dorset: The Overcomer Literature Trust), p. 4.
  33. Watchman Nee, Spiritual Authority (New York: Christian Fellowship Publishers, Inc., 1972), p. 99.
  34. Pember, op. cit., p. 109.
  35. C. H. Macintosh, Genesis to Deuteronomy (Neptune: Loizeaux Brothers, 1972), p. 788.
  36. Ibid.
  37. Ibid., p. 789.
  38. William Law, The Power of the Spirit, edited by Dave Hunt (Fort Washington: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1971), pp. 98-99.
  39. Ibid., pp. 101-102.
  40. Ibid., p. 104.
  41. Ibid., p. 105.
  42. Ibid., p. 106.
  43. Nee, op. cit., p. 96.
  44. Ibid., p. 97.
  45. Ibid.
  46. Harry A. Ironside, Except Ye Repent (Minneapolis: Bethany Fellowship, Inc.), pp. 7-8.
  47. Witness Lee, Life-Study of Matthew, Message Nine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77), pp. 106-107.
  48. Penn-Lewis, op. cit., p. 4.
  49. Ibid., p. 5.
  50. Ibid., p. 2.
  51. Ibid., p. 6.
  52. Ibid.
  53. Watchman Nee, The Glorious Church (Los Angeles: The Stream Publishers, 1968), pp. 32-33.
  54. Watchman Nee, The Release of the Spirit (Indianapolis: Sure Foundation, 1965), p. 51.
  55. Watchman Nee, Spiritual Knowledge (New York: Christian Fellowship Publishers, Inc., 1973), p. 97.
  56. Lee, The Economy of God, p. 82.
  57. Lee, The Parts of Man, pp. 17-18.
  58. Nee, Spiritual Knowledge, p. 103.
  59. Lee, The Economy of God, pp. 83-84.
  60. Penn-Lewis, op. cit., p. 8.
  61. Lee, The Economy of God, pp. 84-85.
  62. Lee, The Parts of Man, p. 18.
  63. Lee, The Economy of God, p. 84.
  64. Lee, The Parts of Man, p. 18.
  65. Watchman Nee, The Spiritual Man (New York: Christian Fellowship Publishers, Inc., 1968), vol. 3, p. 69.
  66. Ibid.
  67. Penn-Lewis, op. cit., p. 7.
  68. Ibid., p. 4.
  69. Nee, Spiritual Authority, pp. 101-102.
  70. Ibid., p. 105.
  71. Ibid., p. 106.
  72. Sparks, op. cit., p. 221.
  73. Penn-Lewis, op. cit., p. 5.
  74. Lee, The Parts of Man, p. 19.
  75. Witness Lee, The Knowledge of Life (Los Angeles: The Stream, 1973), p. 167.
  76. Lee, The Experience of Life, pp. 143-144.
  77. Sparks, op. cit., p. 233.
  78. Lee, The Knowledge of Life, p. 169.
  79. Sparks, op. cit., p. 57.
  80. Ibid., p. 56.
  81. Law, op. cit., p. 102.

란 캥거스(Ron Kangas)

©1977 Gene Ford